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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화 이야기

솔로이스트, 불후의 명작을 노리다 모두 다 놓치고 만 영화

   


솔로이스트
감독 조 라이트 (2009 / 영국, 미국, 프랑스)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이미 폭스, 캐서린 키너, 톰 홀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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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가리켜 종합 예술이라 일컫는다. 이는 영화가 음악, 미술, 문학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음악, 미술, 문학이 제대로(!) 한데 어우러져 있는 영화가 있기는 한걸까? 사실 모든 감독이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기 위해 애를 쓰나 대부분은 어느 하나가 나으면 다른 것들은 그 하나를 보조하는데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음악, 미술, 문학이 모두 최고의 역량을 보이는 영화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영화..... 웬지 음악, 미술, 문학의 3박자를 모두 갖추기 위해, 버거운 도전을 감행한 작품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실패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완벽한 미술을 향한 도전 - 탁월한 영상미를 뽐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포스터가 눈길을 사로 잡은 영화였었다. 포스터에서 보여지는 그림 같은 구도는, 감독의 구도감이 꽤나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하였고, 그리고 찾아간 영화 홈페이지의 스틸컷들은 이 영화는 반드시 보아야 하는 영화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지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무 장면이나 캡쳐해도 작품 사진이 될만큼, 카메라는 완벽한 그림을 담아내고 있었다. 헐리우드 영화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만큼 따뜻하고 정적인 장면들로 가득하였고,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탁월한 구도와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흡사 영화라기보다는 멋진 사진들의 파노라마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였다. 아마도 이렇게 멋진 구도를 잡기 위해서, 감독은 큐사인을 넣기 전, 여러 차례 배우들의 위치를 수정하곤 하였으리라.


 

특히, 왜 굳이 터널에서 연주해야 되는지를 묻는 기자(스티브 로페즈)의 말에, 비둘기가 자신의 음악을 반겨준다며, 선물 받은 첼로를 그(나다니엘)가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의 장면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명장면이었다. 그의 연주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비둘기떼들과, 도시 전체를 어루어 보는 듯, 도시의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나래를 펼치는 비둘기의 모습은, 혼탁한 도시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밝히는 그의 모습을 표상하는 듯 하였다.

 

나다니엘이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실로 오랜만에 감상하게 되었을 때, 음악에 빠져든 그가 지긋이 눈을 감은 뒤 펼쳐지는 영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곡의 주파수에 따라 시각화된 파형을 따라 초현실적으로 펼쳐지는 장면은, 음악에 심취한 그를 표현해내는, 그야말로 탁월한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지의 모습을 다루지만서도, 음지의 쓰레기 더미조차 아름답게 보이도록 배치한 안목이 놀라웠다. 심지어 주인공이 걸친 누더기들조차 색감의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을 정도이니, 감독이 작품의 영상미를 위해 어느 정도 신경쓰고 있는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음악에 대한 도전 - 천재 첼리스트가 거리의 악사로 전락하다.

 

음악을 소재로 완벽한 미술을 담아내고 있는 영화였었다. 이제 다음은 제재인 음악을 가지고 관객들을 가지고 놀 차례. 미술적 성과가 이 정도이기에, 음악적 부분은 기존의 음악 영화들이 보여주던 것과 유사한, 음악적 영감을 담아내기만 하면 대성공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천재 음악가라는 캐릭터는, 나다니엘에게서 천재적 광끼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잠재된 그의 역량이 폭발할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첼로'라는 악기가 광끼 어린 천재성을 뿜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오히려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의 천재성이 점차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첼로'도 실제 연주자들 사이에선 천재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악기이겠지만, 상대적으로 바이올린 등에 비해 덜 화려한 탓에, 일반인들의 시각에선 천재적 음악가의 악기로는 덜 부각되는 악기임에 분명하다.)

 

기대하게 하던 그의 첫번째 콘서트는 무대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그의 도망으로 어이없게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그의 두번째 콘서트에서 그의 천재성이 발현되기를 고대하지만, 이는 아예 열리지조차 못한다. 천재적 음악가이던 나다니엘이 거리의 악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후 영화는 음악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도시의 화려함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노숙자와 장애인의 삶을 부각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예술 영화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전락하고 말다.

 

주인공을 '흑인, 장애인, 노숙자'라는 미국 사회의 음지 3박자를 모두 갖춘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 것일까? 관객들은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난 꽃'을 기대하지만, 감독은 그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쓰레기더미 그 자체'를 다루기 시작한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하는 영화가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 영화까지 팔을 걷어부칠 필요는 없었다. 이 멋진 소재는 굳이 사회의 어두운 면이 아니더라도 다룰만한 건덕지가 많았다. 비운의 천재의 모습을 통해 역설의 미학과 이로 인한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는 허우대 멀쩡한 상류층 백인을 앞세워, 미국의 할렘가에서 불안에 떨게 하고, 장애인들과 농담 따먹기를 시키고, 길바닥에 누워 노숙자와 함께 잠들게 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간접 체험 시킨다. 그리고 나다니엘이 아파트에서 잠들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동정심을 사게 하고, 로페즈의 칼럼으로 인해 LA시의 할렘가에 대한 예산이 증액되는 장면을 비추며, 그것이 '정의 사회 구현'인 양 행색한다. 


그렇게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되고만다. 전반부의 그토록 아름답던 영상미가, 기대하던 음악성의 부재로 망연자실해지고, 스토리마저 다큐멘터리가 되고 말면서, 공허히 널부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도전 - 관계에 대한 성찰

 

아름다운 영상들과 함께 천재적 음악가를 기대하게 하는 '전반부'와, 어두운 사회를 비추는데 주력하다 다큐멘터리가 되고마는 '후반부'는, 사실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문학에 대한 도전은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문학적으로 인정할만한 극중 장치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 영화가 '관계에 대한 성찰'을 끄집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혼 경력이 있는 기자(로페즈)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의존하는데 대해 심한 불편을 느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혼을 하였고, 자식에게조차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그 결과 자동응답기엔 음성 메시지조차 남아있지 않을만큼 외로움을 자초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나다니엘이 의지하기 시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뿐더러, 그를 가리켜 신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하며 그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회사 앞까지 찾아올 뿐 아니라, 전화를 걸어 칭얼대며 끊을 줄을 모른다. 그에게 있어 나다니엘은 '도시를 밝히는 천사'에서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로 점점 전락해간다.

 

사실, '관계에 대한 폐쇄성'은 나다니엘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정신분열을 앓게 된 뒤, 그의 누이동생이 가져다 주는 음식물조차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식이라 여기며 다른이들과의 관계를 거부하기까지 하던 그이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로페즈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로페즈는 콘서트의 실패 후 나다니엘의 실종을 계기로, 밤새 그를 걱정하고, 결국 그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나다니엘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서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는 나다니엘 역시 마찬가지다. 후견인으로서의 누이동생을 거부하지만, 결국 그의 누이동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엔딩에서 나다니엘, 누이동생, 로페즈, 전 부인 순으로 카메라가 비쳐지는 것은 결코 스쳐지나가는 의미 없는 장면일 수 없다. 이는 로페즈와 나다니엘이, 그들간의 관계 맺기로 말미암아, 그동안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로페즈 역시 전처에 대한 책임감과 관계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감독은 나다니엘, 누이동생, 로페즈를 비춘 뒤 한 박자 뒤에 전 부인을 비춘다. 여기서 쉬어가는 '한 박자'는 나다니엘 뿐만 아니라 로페즈 또한 관계를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깜짝쇼이다. 이것이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한구절이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는 이유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최고!

 

1. 제이미 폭스

 

천재적 음악가의 광기와 노숙자로서의 주눅든 모습을 동시에 구가할 수 있는 배우를 구하기가 쉬울까? 글쎄, 헐리웃의 인프라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으나, 설령 구할 수 있다한들 '나다니엘 에어스'역을 맡은 '제이미 폭스'를 능가할 수 있을런지엔 의문이다. 모순된 이미지를 자연스레 소화해낼 수 있으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갖춘 흑인배우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제이미폭스'는 '나다니엘 에어스'에 탁월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기도 하고 팝가수로도 활동한 전력이 있었기에,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역시 다른 배우와는 차원이 다를 수 있었다.

 

2.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이 영화를 관람한 누가, 이 배우를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라고 생각하겠는가? 또 이 배우가 코미디 부분 연기자상을 받은 배우라면 믿어지는가? 그만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마냥, 그 영화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여러 종류의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왔다. 그에게 붙은 '팔색조 배우'라는 명성은 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또다시 변신하여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 상류층 백인의 모습을 어김없이 잘 소화해낸다. 그의 커단 눈망울에 담겨진 깊이와 여유가 그 연기력의 내공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며.....

 

솔직히 말해 이 영화의 감독인 '조 라이트'는, 영화보다는 광고나 뮤직비디오 쪽으로 전업을 하면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영화에는 소질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나, 그만큼 영상미로는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고 음악에 맞춰 영상을 구현하는 능력 또한 매우 탁월하였기 때문이었다. 음악, 미술, 문학의 모든 요소를 고르게 아우르며, 뭔가 불후의 역작을 남기고 싶어 하는 듯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엿보이나, 워낙 늘어 놓은 것이 많아 수습이 안되는 듯한 인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욕심을 좀 줄이고, 한 영화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 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꺼번에 모두 보여주려 하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보여준 것이 하나도 없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냥 음악에 포인트를 맞추고, 영상미로 보조를 맞췄으면, 그래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다루면서도 사회문제를 다룰 수는 있지만, 작품의 초반부에 캐릭터 형성에 들인 공을 생각해서라도, 사회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주종이 갑자기 뒤바뀌어 곤란하기만 하였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나다니엘 뿐만 아니라 그가 LA 타임즈 기사에 실린 것까지도,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다보니, 나다니엘을 천재 음악가로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없지만), 이 이야기를 토대로, 음악에 보다 초점을 맞춘 영화로(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 다시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할지언정, 사실성보다는 예술성, 그리고 작품성에 좀 더 초점을 맞췄어야 하는 영화였기에 그렇다. 이 소재가 너무나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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