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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화 이야기

[리뷰] 애자(1) - 모순과 역설의 변주곡으로 딸의 가치를 말하다.

   


애자
감독 정기훈 (2009 / 한국)
출연 최강희, 김영애, 배수빈, 최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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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첫째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면 백점짜리 아빠, 둘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아들이면 팔십점짜리 아빠,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면 육십점짜리 아빠, 첫째가 딸이고 둘째도 딸이면 빵점짜리 아빠라고.....

 

이 말은 최근의 딸에 대한 선호를 반영하는 말인가 하면, 여전히 남아 있는 남아선호사상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 딸을 원하면서도 아들은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애자, 모순과 역설의 변주곡

 


 

이 영화는 요즘 부모들이 왜 딸을 원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땅의 많은 엄마들은 늘 아들을 우선시하고 아들에게 헌신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에 엄마 곁을 지켜주는 것은 늘 다음 취급하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요즘 부모들은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고 딸을 키워야 노후가 편안하다고들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엄마는 아들에게는 유학을 보내주기도 하고, 사업 자금을 대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들에게 들인만큼의 정성을 쏟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가 몸져 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아들은 엄마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에 엄마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들이 아닌 딸이다. 공들인 아들은 결국 곁에 없지만 차치한 딸은 부모를 공양하는 것이다.

 


         <아들을 유학보내는 공항으로 찾아와 나도 유학을 보내달라고 조르는 딸>


엄마도 예전에는 누군가의 딸이었었다. 그리고 엄마도 딸이라는 이유로 다음 취급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어미에게 불만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딸이 다시 엄마가 되면 또다시 그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에게 집착하고 만다. 왜 그런 것일까? 남아선호사상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영화 속에서 딸은 아들만 위하는 엄마에 대한 반발로 소위 불량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천방지축, 선머슴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엄마가 병약해지자 딸은 그동안의 행동이 무색할만큼 끈덕지게 어머니를 간호하고, 그동안의 모습이 무색할만큼 딸다운 딸로 변하여 어미 곁에서 슬퍼한다. 아들보다 더 심하게 아들처럼 굴던 딸이 한순간에 딸 같은 딸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학교에 불려온 어머니와 딸, 딸은 엄마에 대한 반항으로 불량학생이 되어있다.>

 

이들은 모두 모순이라 하겠다. 공들인 아들은 결국 곁에 없지만 차치한 딸은 부모를 공양하는 것, 그 딸이 다시 엄마가 되면 또다시 그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  아들보다 더 심하게 아들처럼 굴던 딸이 한순간에 딸 같은 딸로 변해 버린 것, 이 모두가 앞뒤가 들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들은 단지 모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모순들은 모두 그 속에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모순이 아닌, 역설, 패러독스다. 이는 모두 좋은 의미의 모순들이다.


역설   명사
발음〔-썰〕


이 영화가 이렇게 좋은 의미의 모순, 즉 역설로만 점철되어 있는 작품이었으면 참 좋을 뻔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 속의 모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순 그 자체인 모순들이 앞서 언급한 역설들을 망쳐 놓았다. 다음을 보게 되면 이 같은 사실은 분명해진다.

 

엄마는 수의사로 유기견 안락사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방식은 스스로에 의한 안락사였다. 모순이다. 하지만 이 모순은 그 속에 어떠한 진실도 진리도 담고 있지 않다. 관객들로 하여금 억지 눈물을 끌어내려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결국 이 모순은 역설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작품을 신파의 나락에 빠뜨리고 만다.

 

장례식에 울먹이고 쪼그려 앉아있는 딸에게 죽은 엄마가 다가가 말을 건네는 장면도 그렇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이 역시 모순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단지 억지 눈물을 끌어내려는 차원에서 그냥 머물고 만다. 영화를 신파로 만드는 다름 아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통에 도리어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조선시대 때 쓰여진 귀신 나오는 소설(전기소설),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가 이보다는 나을 정도다. 밋밋한게 더 슬플 거라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효과도 처리되지 않은 죽은 엄마의 모습에 전혀 감정이 몰입되지 않는다.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안락사를 통한 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모순들은 앞서 언급한 좋은 의미의 모순들을 망쳐놓았다 하겠다. 뒤의 모순들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사회구조적 모순에 의해 왜곡된, 딸과 아들의 관계를 꼬집은, 어쩌면 제대로된 딸과 엄마를 위한 영화로 기억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음 편 '[리뷰] 애자(2) - 애자라는 이름의 역설법과 단점의 극복'에서 계속됩니다.                                           클 릭 해 주 세 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