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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화 이야기

<2012>, <해운대>는 <2012>에 감사해 하라!


<2012> 영화라기보다는 가상체험에 어울리는 영화

 

2012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2009 / 미국, 캐나다)
출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치웨텔 에지오포, 탠디 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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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으로 인해 공룡이 멸종되었다는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우리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 또한 그리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최근의 녹색 에너지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고대 예언서나 종교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지구 멸망설'을 통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맹목적 믿음을 본질로 하는 종교의 특성 상,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막연한 공감대와 함께 더 큰 아우라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종말론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2012년에 일어난다는 그것이다. 90년대 중반의 휴거설, 99년의 종말론의 허위를 통해 '종말'에 대한 내성이 생겼음직도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집단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연 어떨까?'하는 두려운 호기심이 불안감으로 바뀌어가는 이 무렵, 2012년의 종말론을 다룬 <2012>라는 영화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2012>는 모른 척하려 하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포착한 영화라 하겠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누구나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이미 흥행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재난 영화의 집대성, 더 이상의 재난 영화는 없다.

 

이 영화가 지구가 멸망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몇몇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는 천재지변이다. 감독은 이미 <투모로우>나 <인디펜던스데이>를 통해 이미 재난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있는 만큼, 이 분야를 다룸에 있어 상당히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 쌓인 노하우만큼이나 천재지변의 모습을 매우 사실성 있게 보여준다.

 

일단 스케일부터 장난이 아니다. '지진, 화산, 해일'이라는 재난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모든 천재지변을 다 다루고 있다. 당분간 다른 감독들이 재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파괴되고 붕괴되는 것들의 수준도 장난이 아니다. 도로나 민가는 물론, 빌딩, 백악관,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 유산까지 거침 없이 무너뜨린다. 최고급 자동차, 선박, 비행기, 철도까지, 고가일수록 더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아낌없이 박살내 버린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공간적 배경의 범위도 장난 아니다. 처음부터 세계 개봉을 염두에 둔 듯, 동서양을 넘나들고, 영화에서 다루는 사상적 배경 또한 고대 문명(마야, 아틀란티스)을 비롯하여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까지 다양하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전 해운대로 천 만 관객을 돌파했던 윤제국 감독은 에머리히 감독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야할 것 같다. 이 영화가 해운대보다 먼저 개봉하였다면, 아마 그 스케일 차이로 인해 민망해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흥행도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놉시스 정도면 영화 시나리오가 모두 끝나버릴 것 같은 영화

 

앞 서 살펴본 바, 이 영화의 볼거리는 어느 영화보다도 뛰어나며,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이것만으로도 관람료가 아깝지 않다면 얼마든지 이 영화를 보아도 좋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볼거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볼거리에 치중하다 보면 시나리오가 다소 빈약해 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는 시놉시스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든 영화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만큼 시나리오가 부실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억지 감동을 쥐어 짜내고 있어 역겹다. 특히 휴머니즘을 선동하는 듯한 닭살스러운 멘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초등학생을 주 관객층으로 삼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매한 대중을 가르치려는 듯한 고자세가 눈에 거슬린다. 심지어 유치한 수준의 시나리오에 배우들이 열연하는 모습에서, 배우들의 진정한 프로 정신이 느껴졌다고나 할까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순진한 사람도 아닐진데, 죽음 앞에 이기적으로 변모하는 인간군상의 치열함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위기를 통한 이혼부부의 재결합이나 가족지상주의는 그야말로 흔해빠진 상투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전남편과 현애인이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삼각 관계나 젊은 지질학자 한 명에 의해 미국 전체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 4시간 비행 교육을 받은 것에 불과한 사람이 비행기를 몬다는 점, 국민을 위해 미국에 남아 헌신하는 대통령의 모습 등은 지극히 비현실적일 따름이다. 특히 일개 지질학자가 배에 타지 못한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타국의 정상들을 설득하고, 또 어이없이 쉽게 이를 수락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치를 하락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러시아 거부가 자식을 위해 자신을 갑작스레 자신을 희생한다던가, 러시아 거부의 애인이 그의 부하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밝힌다던가, 유압기를 고치러 간 커티스가 한참을 돌아오지 않다가 뒤늦게 나타난다던가 하는 장면은 반전이랍시고 준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형편 없기 그지 없다. 

 


애매모한 주인공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잭슨 커티스 역을 맡은 존 쿠삭? 애드리언 헤슬리역을 맡은 치웨텔 에지오포? 잭슨 커티스의 가족들? 미국 대통령? 인류?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재난 영화의 그 장르적 특성 상, 인물과 인물 간의 갈등 관계를 설정하기 어려우므로, 인류와 재난 사이의 갈등을 다루다 보니 필연적으로 이러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인과 인류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야기의 초점이 응집되지 못하고 흐트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개인과 인류를 모두 주인공으로 삼으려 했다면, 개인에게 전형성을 부여하면 된다. 물론 에머리히 감독도 이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등장 인물들에게서 전형성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전형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범인류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범인류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려 한다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모양새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해운대>의 윤제국 감독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인물에 대한 전형성을 확보하여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가는데는 에머리히보다는 그가 성공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며

 

지금까지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2012>를 살펴보았다. 이 영화는 그 스펙터클한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영화관에서 봐줄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동의한다.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산다. 따라서 이 영화는 무조건 흥행하게 될 것이란 점에서 이견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가상체험 스튜디오'가 아니다. 스토리 속에서 진실을 담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로서는 실패한 영화다. 만약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가급적 큰 화면에,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볼 것을 권장한다. 맨 앞 줄이나 맨 뒷 줄, 좌우 측면에서는 이러한 가상체험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를 찍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제작과정에서 철퇴를 맞지 않았을까 싶다.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며 종교단체들의 반발을 사며 갖은 시위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픽션을 픽션으로 바라봐주는 미국의 성숙된 예술관이 부럽다.

 

ps1. 아들래미 이름이 '노아'라 '21세기판 노아의 방주'에서 크게 한 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별 것 없었다. 뭥미?

ps2. 방주에 탈 돈이 없지만, 어떻게든 타보겠다고 발악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깡(?) 혹은 무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방주에 타는 데 성공한다. 내가 현실적 한계에 쉽게 순응하는 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 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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