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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화 이야기

디스트릭트 9, SF의 탈을 쓴 화끈한 풍자극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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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드 블로그와 다음 영화에서 베스트글로 선정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초대형 우주선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우주선은 그 자리에 한참을 멈춰선다. 그들의 출현 배경을 궁금해하던 지구인들은 결국 우주선 안으로 진입하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진입한 우주선 속에서 몹시 굶주려 있는 수많은 외계인들을 발견한다. 이에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을 구출하기로 결정하고, 우주선 바로 아래를 외계인들의 거주지역인 디스트릭트 9(District 9)로 명명한다. 외계인은 그 곳에서 생계를 꾸려가고, 지구인들은 그 앞에 외계인과 지구인의 화합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운다.


< 지구인과 외계인의 화합을 알리는 상징물 >


 그런데 왜 하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일까?

 

영화 속에서 한 캐스터는 방송에서 이렇게 외친다. '우주선이 지구에 나타났습니다.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바로 요하네스버그에 말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왜 하필 요하네스버그인 것일까. 물론 감독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라고 생각하면 이같은 고민은 쉽다. 한국 사람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는 것이 당연하듯,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배경으로한 영화를 찍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캐스터의 이 같은 발언은 이상하다. 감독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이기에,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이라는 발언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발언은 이 영화의 배경이 요하네스버그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영화의 배경이 단순한 배경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요하네스버그의 현 상황이 이 영화에 거짓말처럼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SF의 탈을 쓴 한 편의 풍자극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본격 SF 우주물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영화를 만들고 소화할만한 자본과 시장이 확충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낸 경험조차 미천한 상황이라, 훌륭한 작품을 뽑아낼만한 스태프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좋은 스태프를 구성할 수 없다면 당연히 영화의 퀄리티가 떨어지기 마련이고, 관객의 수준은 미국의 그것에 맞추어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져있기에,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SF는 SF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SF의 탈을 쓰고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마치 우리나라의 SF 영화(?)인 '지구를 지켜라'처럼 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외계인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외계인을 매개로 다른 이야기를 시도한다.(물론 충분한 SF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 다른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픈 시대상'을 꼬집는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되던 국가였다. 그래서 당초 요하네스버그에는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은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정책이 폐지되게 되자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흑인들이 몰려와 살게 되었다. 그들이 몰려 들어와 살던 지역은 자연스레 할렘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지역은 '디스트릭트 6(District 6)'라 불려지게 된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의 땅값이 치솟게 되자, 정부는 본의 아니게 노른자위땅이 되버린 '디스트릭트6(District 6)'을 개발하고자, 그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하고 만다.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 Apartheid 분리,격리를 의미)는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차별)정책을 말한다. 1990년부터 1993년동안 남아공 백인정부와 흑인대표인 ANC 만델라간의 협상끝에 급속히 해체되어 민주적 선거에 의하여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4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인종별로 거주지분리, 통혼금지, 출입구역분리등을 두는 등,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사상 유래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


<세면대 조차 백인과 유색인종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달랐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이 영화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 속의 외계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강제 이주 당해야 했던 흑인들과 다를 바 없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수모를 당해야만 했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원시 생활 그 자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된다. 고양이 통조림으로 달래려는 모습이나 무턱대고 폭력을 당하고 학살 당하는 모습 또한 당시 흑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다음을 보면 이 영화가 풍자극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 생각된다. 영화 속 장면들은 인종차별 문제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포개진다.


1. 사람들은 프론이라 놀리고 멸시한다.

 -> 사람들은 흑인이라 놀리고 멸시한다.

2. 사람들은 프론에게 쉽게 폭력을 가하고 학살하기까지 한다. 

 -> 사람들은 흑인에게 쉽게 폭력을 가하고 학살하기까지 한다.

3. 사람들은 프론들을 고양이 통조림으로 달랜다. 

 -> 사람들은 초컬릿이나 간단한 식료품으로 흑인들을 달랜다.

4.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프론들에게 사기를 친다. 

 -> 실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 사기꾼이나 갱으로 골머리를 썪히고 있다 한다. 

5. 사람들은 외계인 출입구역과 사람 출입구역을 구분하였다.

 -> 백인과 유색인종의 출입구역을 구분하였다. 심지어 교통수단, 병원 등 공공시설조차도!

6. 외계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며 물건을 훔치고 빼앗는다.

 -> 흑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고 물건을 훔치고 빼앗았다.

7. 프론들에게 있어 공권력마저도 우호적이고 공평하지 않았다.

 -> 공권력(경찰)은 일방적으로 백인편이었으며, 흑인들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8. 지구인은 프론들의 무기와 기술을 빼앗으려 한다. 

 -> 백인들은 흑인들의 자원과 노동력을 이용하였다.


 

<좌측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전용구역 표시, 우측 : 영화 속의 인간 전용구역 표시>


이 영화는 6분짜리 단편영화로 제작되었던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아남기'를 그 모태로 한다. 이 단편 영화 위에 피터잭슨의 자본력이 더해져 장편 영화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편의 제목이 왜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아남기'다. 차별이 심한 요하네스버그에선 그 차별 때문에 외계인이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로써 이 작품이 SF의 탈을 뒤집어 쓴 풍자극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해 진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제목, '디스트릭트 9(District 9)'도 한 번 보자. 실존했던 '디스트릭트 6(District 6)'에서 숫자 하나만 거꾸로 뒤집어 놓은 '9'를 쓰고 있다. 단편의 제목보다 덜 직접적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요하네스버그의 인종차별을 풍자하는 제목인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아남기'와 피터잭슨의 힘

 

본래 이 영화는 6분짜리 단편영화로 제작되었던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아남기'를 그 모태로 한다. 블룸감독이 이 단편영화를 유튜브에 올린 것을터 잭슨이 보게 되었고, 이 단편 영화에 주목한 피터 잭슨이 그에게 투자를 결심하여 장편 영화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장편으로 거듭나면서 특히 달라진 것은 외계인의 형체이다. 단편에서는 안면부에 문어발이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외계인같다라기 보단 유전자 조작에 의한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피터잭슨의 자본력과 메이저 영화 제작 경험이 덧붙으면서, 그의 영화는 제대로된 SF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잘 알려진대로 피터잭슨은 반지의 제왕과 킹콩을 감독한 티켓파워를 지닌 감독이지만, 그 이전에 소위 B급화라 불리는 마이너 감독이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피터잭슨은 B급 영화에 불과한 그의 단편에 주목하였고 과감히 투자할 수 있었다. 





역지사지를 통한 깨달음.

 

이 영화의 절정이라면 역시 '주인공이 외계인으로 변해 가면서 겪는 내적 갈등과 외계인에 대한 이해'를 들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건모의 노래처럼,(내게 그런 핑계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인간은 외계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외계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처럼 말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감독은 외계인을 학대하는 당사자(강제 이주의 총책임자이므로 인성과 관계 없이 분류하였음)를 외계인으로 변하게끔 설정한다. 그를 통해 지구인으로 남아 있고 싶어하는 몸부림과 절규를 보여주는 동시에, 외계인들을 서서히 이해하게 만든다. 여기서 감독은 인종 차별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흑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흑인들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들이 흑인이 되어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설정을 동원하여 백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강제 이주를 맡은 총 책임자이다. 어리석은 외계인들을 호도하여 억지 서명을 받아낸다.>

 

외계인과 함께 연구소로 난입하여 무기를 탈취해 오기까지와 크리스토퍼의 집에서 크리스토퍼를 공격하는 과정까지는 지구인으로서의 미련이 남아 있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연구소를 탈출하고 난 후 찾아간 햄버거 가게에서 백인들만 서는 줄에 서 있는 장면이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디스트릭트9(District 9)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고양이 통조림을 먹으면서 서서히 외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난 후 크리스토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서부터는 외계인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영화의 엔딩에서 외계인으로 완전히 변한 주인공은 사랑하는 그녀의 부인을 위해 쓰레기 더미 속에서 꽃을 만들어 그녀에게 몰래 바친다. 그는 비록 지금 외계인이지만, 외계인에게도 지구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있음을 보여준다. 푸대접 받는 흑인들 역시 백인들 못지 않은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다큐멘터리? 모큐멘터리?


이 영화는 크게 보아, 전반부의 다큐멘터리씬과 후반부의 스토리씬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감독은 왜 영화의 전반부에 다큐멘터리씬을 사용했을까? 


사실 다큐멘터리씬은 자칫 지루해 보이기 쉽다. 극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이 작품이 재미없다고 하는 일부 평들은 대부분 다큐멘터리씬이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꼭 필요했다고 본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하게 되면 작품의 사실성과 현장감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풍자를 본질로 하는 이 작품에서는 사실성의 확보야 말로 매우 중요한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씬을 통해 이 작품은 현실과 더욱 포개질 수 있는 것이다. 이 패턴을 사용함으로써 발생되는 다소 지루해질 수 있다는 단점은 짧은 편집들을 통해 각 씬들을 콜라쥬 엮듯 엮음으로써 극복하였다.   


<외계인으로 변해가면서 생체 실험 대상이 되는 주인공>


헐리우드를 넘어선 참신함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듯, 기존의 헐리웃의 문법을 탈피한 매우 참신한 작품이다. 헐리웃의 문법을 탈피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이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헐리웃 영화에서는 미국이 인류의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미국이 아니라면, 지구는 금방 패망의 길을 걷고 만다. 어쩌면 이는 미국영화이기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이 영화는 미국영화가 아니기에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도 아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외계인이 나타났다면, 미국이 특정한 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영화인 괴물만 하더라도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자 미국이 개입을 한다.(물론 미국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미국이 개입된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참신하다 평가받을 수 있다.

 

2) 외계인은 지구를 위협하는 공격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외계물에서 외계인은 지구를 공격하려는 침입자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외계인은 침입자이기는 커녕 힘없고 모자란 일개 종족일 뿐이다. 외계인을 인류에 해가 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야할 동반자로 인식한다. 이 역시 기존의 영화에서 제시하던 것과는 차별이 된다.

 

3) 주인공은 지구를 구하지 않는, 일반 소시민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헐리웃 영화에서는 영웅이 등장한다.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 이 영웅은 지구를 구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영웅이 아닐 뿐더러 지구를 구하지도 않는다. 승진에 기뻐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이고, 외계인으로 변하고 나서는 지구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악하는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며, 더군다나 지구를 구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이 영화는 기존의 헐리웃 영화에서 보여주던 문법들을 상당부분 탈피하였다 보아도 될 성 싶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 대단할 것은 없지만, 이 조차도 대단히 여길만큼 헐리우드 영화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다소 안타깝기만 하다.


 <대단히 멋있어 보이지만, 주인공의 용감함은 인간으로 돌아가겠다는 이기적인 발로일 뿐이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키포인트들.

 

영화를 보면서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여러번 되짚어 보고 나서야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1) 우주를 거슬러 온 외계인들이 왜 저능할까?

 

지구인은 아직까지 생명체가 살고 있는 다른 행성을 발견할만한 운송 수단조차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외계인들은 지구에온 것에서 보다시피, 이미 다른 행성에 진입하고 항해할만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무기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무기보다는 훨씬 우월한 무기를 외계인은 확보하고 있다. DNA를 통해 가동되는 컴퓨터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그들은 지구인들에게 농락당하여만 하는 것일까? 이러한술력과 무기라면 인류와 전쟁을 벌여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이 영화의 포인트가 외계인들의 힘을 보여주는데 있지 않고 외계인을 통해 인종차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니, 외계인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 되어 버린다.

 

둘째,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난민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오랜 피난의 시간 동안 전혀 배우지 못했고 치열한 생존 싸움에 시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문명인의 모습보다는 원시인의 이기적인 본성만 남게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이지리아 갱단에게 일방적으로 사기 당하는 것은 좀 어불성설이었다. 강력한 무기로 제압해버리면 그만이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갱단의 심각성을 풍자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생각하고 마련다.


< 홀로그램에 의한 모니터 화면, 지구인보다는 앞 선 문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


2) 그렇다면 리더쯤 되는 외계인인 크리스토퍼는 도대체 20년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그리고 왜 다른 외계인들을 구하지 않을까?

 

외계인 주인공인 크리스토퍼는 다른 외계인들과 달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모선을 집 아래 숨겨놓고 인간의 컴퓨터로 모선을 수리할만큼 유능하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이토록 수모를 당하는 동안, 그는 왜 외계인들의 리더가 되지 않았고,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 우주선을 타고 외계로 떠날 때 다른 외계인들을 팽개치고 가버린 것일까? 

 

이 역시 납득하기는 쉽지 않지만, 앞 서 언급했던 바처럼 오랜 피난 생활로 인한 치열한 생존 싸움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인간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다. 지도자감으로 충분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보다는 나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본성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3) 연료가 묻었을 뿐인데 왜 외계인으로 변하는 것일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외계인들의 모든 기술은 외계인의 DNA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주선을 조종하는 것조차 DNA 인식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무기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우주선의 연료 또한 외계인의 DNA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외계인의 DNA에 접촉하게 된 주인공은 점차 외계인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체의 절반이 외계인으로 변해가고 있다.>

 

마치며

 

지금까지 디스트릭트 9을 살펴보았다. 이 영화는 외계인의 등장을 빌미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차별을 꼬집은, SF의 탈을 쓴 일종의 풍자극이었다. SF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 탓에 본의 아니게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차기작을 고대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사회적 메시지에 더 치중하고 있는 탓에 그에게서 또다시 이런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싶다.

 

이 영화의 후속편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속편이 나올 확률은 상당히 낮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자신의 별로 돌아간 크리스토퍼가 군대를 이끌고 와 지구를 공격하는 형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외계인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동반자 정신,과는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이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영화의 후속편이 제작된다면 그것은 다른 감독에 의해서거나(거액의 판권을 받은 후), 아니면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토퍼는 외계로 도망갔다. 그러면서 군대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외계인과의 화합은 불가능하고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메시지는 아닐까 두렵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유혈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토퍼의 눈물, 외계인에게도 인간다운 감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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